축구 선수 분석

무능력 경질 위기 클린스만 감독의 선수시절 클래스와 기록, 실력 평가

마리엔느 2024. 1. 28.

클린스만 감독님은 독일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입니다. 2000년대생 이후 분들은 잘 모르실 수 있겠지만, 클린스만 감독은 선수시절 상당히 클래스가 높은 선수로 유명했습니다. 

클린스만 감독은 유럽 명문클럽에서 뛰면서 많은 우승을 했었습니다. 1994년 월드컵 때는 한국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선수였습니다. 1994년 월드컵 때의 클린스만 선수의 카리스마와 포스는 가히 압도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성격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젊은 시절 클린스만 감독은 상당히 카리스마 있고 파괴력 있는 공격수 였습니다.

클린스만의 키는 181cm이고 몸무게는 73kg 으로 알려져 있는데, 팔다리가 길고 피지컬이 좋아서 경기를 보고 있으면 체감적으로 185cm 급은 되어 보였습니다.

 

금발의 폭격기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으로서의 클린스만은 한국의 축구팬들에게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선수 시절의 클린스만은 쉽게 평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처음에 클린스만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뉴스 발표가 떴을 때 저는 좋았습니다. 외국감독들이 한국에 와서 자주 경질되거나 때로는 무책임한 모습들도 많이 보여주었는데, 어차피 그렇게 될 바에야 슈퍼스타 클린스만 감독 얼굴이나 계속 가까이서 봤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먼 미래에,  감독으로서 역량 없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하고 싶다고 한다면, 감독이고 뭐고 간에 얼굴이나 보자 하고 찬성할 사람들이 있을 것 처럼 말입니다.

 

 

1. 역대 대한민국 축구 외국인 국가대표팀 감독 네임밸류

 

역대 대한민국의 외국인 국가대표팀 감독은 여러명이 있었습니다.

 

아나톨리 비쇼베츠 (러시아)

거스 히딩크 (네덜란드)

움베르투 코엘류 (포르투갈)

요하네스 본프레레 (네덜란드)

딕아드보카트 (네덜란드)

핌 베어벡 (네덜란드)

울리 슈틸리케 (독일)

위르겐 클린스만 (독일)

 

이렇습니다.

감독으로서가 아닌 선수로서 이 외국인 감독들의 커리어를 비교해본다면,  단연 클린스만 감독이 선수시절 압도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었었습니다. 

 

2. 클린스만 감독 선수시절 통산 클럽 커리어

 

슈트트가르트 시절 클린스만 감독 사진.

 

클린스만 감독은 1981년 슈트가르트 키커스에서 프로 데뷔합니다. 

1984년부터 1989년  까지 6년 동안 155경기 79골을 기록합니다. 1897-1988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올랐으며, 1988년 독일 올해의 축구선수에 선정되었습니다.

 

인터밀란 시절 클린스만 사진. 신문들고 컨셉잡는다.

 

1989년 부터 1992년 까지 인터밀란에서 4년 동안 95경기 34골을 기록합니다. 1990~1991 시즌에는 UEFA컵 우승을 하게 됩니다. UEFA컵을 지금의 UEFA 컵과 비교하면서 폄하하실 수 있겠지만, 지금의 UEFA컵과 과거의 UEFA컵의 위상은 현저하게 다릅니다. 1990년대 초에는 UEFA컵에 각 리그 2위에서 4위의 팀만이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챔피언스리그는 각 리그의 1위에서 4위의 팀이 참가하게 됩니다. 과거의 챔피언스리그는 각 리그의 1위만이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1위만이 참가할 수 있었던  챔피언스리그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각 리그의 상위 4개 팀은 모두 그날의 컨디션에 의해서 승패가 좌우될만큼 우열을 쉽게 가릴 수 없는 강팀들입니다. 1위끼리만 경쟁하는 챔피언스리그가 당연히 가장 가치가 있겠지만, 2위에서 4위까지의 강팀들이 참가하는 UEFA컵도 높은 가치를 인정 받던 시절입니다. 

 

AS 모나코 시절 클린스만 감독 사진. 칼날 콧대와 턱선, 옆모습.

 

1992년부터 1994년 까지 AS모나코에서 3년동안 65경기 29골을 기록합니다. 1993-1994 시즌에는 리그앙 우승을 합니다. 

 

토트넘 시절 클린스만 감독 사진. 날으는 융단폭격기

 

1994년 부터 1995년까지 토트넘에서 2년 동안 41경기 21골을 기록합니다. 1994~1995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월간 최우수 선수 2회 수상을 합니다.

바이에른뮌헨 시절 클린스만 감독 사진. 탈모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바이에른뮌헨에서 3년 동안 65경기 31골을 기록합니다. 1995~1996 시즌에는 UEFA컵 우승을 했고, 1996~1997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 때 역시도 지금의 UEFA컵과 다른 우승하기 어려운 대회였습니다. 여기서 UEFA컵 15골을 기록하며 UEFA컵 득점왕 타이틀을 따냈고, 이는 UEFA컵 한 대회 역대 최다골 기록입니다.

 

토트넘으로 돌아온 클린스만 사진. 돌아온 황태자

 

1997년부터 1998년까지 2시즌 동안 삼프도리아에서 8경기 2골을 기록하고, 그 기간에 토트넘으로 임대 이적하여 15경기 9골을 기록합니다. 

클린스만은 손흥민 선수의 토트넘 선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손흥민 선수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클린스만이 삼프도리아에서 토트넘으로 이적하게 된 이유는 강등 위기의 토트넘이 클린스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으며, 토트넘으로 복귀한 클린스만은 15경기에서 9골이나 기록하고, 모두 순도높은 골들을 기록하며 토트넘을 강등에서 구해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토트넘 팬들에게 화자되고 있으며, 클린스만이 그의 커리어에서 아주 오랜시간을 토트넘에서 보낸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레전드 대우를 받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클린스만 선수는 정식 프로선수 커리어를 마무리 합니다.

선수시절 유럽에서만 뛰었으며 총 경기수 506경기 통산 골은 226골이나 됩니다. 

 

 

2003년에 미국 USL 리그의 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 라는 팀에서 8경기 5골을 기록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클린스만 선수가 말년에 갑자기 5년 뒤인 2003년에 축구선수 활동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 때 부터 약간 유쾌한 스타일의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점이 USL 리그는 미국 축구 리그의 2부리그라고 볼 수 있다는 점 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스트라이커 경력의 클린스만이 당시 인기가 많이 없었던 축구 변방국인 미국에서, 그것도 2부리그에서 축구를 했다는 것 입니다. 클린스만 선수가 말년에 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에서 뛴 이유는, 순전히 축구가 그냥 하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경력 입니다.

 

3. 독일 국가대표팀 선수시절 클린스만 감독 커리어

 

유로 96 우승 후 환호하는 클린스만과 뒤에서 웃는 엘리자베스 여왕 사진

 

클린스만은 1987년부터 1998년 까지 13년 동안 국가대표를 했으며, 국대 통산 108경기 47골을 기록했습니다. 클린스만은 1990년 월드컵 우승, 1996년 잉글랜드에서 열린 유로 96에서 우승 하였습니다. 월드컵 타이틀과 유로 타이틀을 모두 보유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0년 월드컵은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으며, 이 대회에서 클린스만은 당시 독일로 통일 되기 전 서독 선수로 출전하였습니다. 

 

클린스만은 월드컵 득점왕 타이틀이 없습니다. 그러나 클린스만은 골 수로는 1990년 이태리 월드컵에서 득점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 월드컵 득점왕인 이탈리아의 살바토레 스킬라치 선수와 골 수는 6골로 동률이었으나 클린스만 선수의 경기 수가 더 많아서, 동일한 골 수를 기록했을 경우 더 적은 경기수를 뛰는 선수에게 득점왕을 주었던 당시 규정에 따라 득점왕 타이틀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클린스만과 마라도나의 월드컵 결승 대결 사진.

 

1990년 월드컵에서는 전설의 축구영웅 마라도나와 클린스만의 빅매치가 이뤄집니다. 클린스만은 결승전에서 득점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아르헨티나 선수의 레드카드 퇴장을 유도해서 서독팀의 1 대 0 승리 큰 기여를 합니다. 

 

1990년 클린스만은 월드컵 우승의 공로를 인정받아 피파에서 선정한 올해의 선수 4위를 차지합니다.

클린스만은 월드컵 통산 골 수 11골로 역대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 순위 7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과거 월드컵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클린스만 감독은 선수시절 그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공격수였다고 하겠습니다. 

 

 

4. 클린스만이 생각보다 빨리 은퇴한 이유

 

클린스만이 선수 시절 마지막 까지 훌륭한 플레이를 해주었지만 빨리 은퇴한 이유는 나름대로 이정도면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축구선수로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들을 거의 다 느꼈고, 그래서 은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는 이유는 클린스만 감독은 선수시절 월드컵 우승, 유로 우승, 챔스우승은 아니지만 UEFA컵 우승, 분데스리가 우승, 리그앙 우승, UEFA컵 득점왕, 분데스리가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정도면 후회없는 선수생활을 했다고 자부심을 가질만한 커리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5. 맺음말

클린스만 선수시절 특유의 저 표정과 골세레모니를 잊을 수 없다.

 

클린스만 선수가 골을 넣고 폭발적인 세레모니를 할 때면, 참 무서운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 때 당시 클린스만 선수에게 느껴진 감정은 "잘하네" 가 아니라 "무섭다." 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클린스만이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이 되었다고 했을 때 과거의 기억 때문에 든든했었나 봅니다. 감독 클린스만은 조금 달라져 있지만 과거 커리어와 플레이스타일을 보면 분명히 한 성격 하는데 웃으면서 살기로 마음 먹고 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공포의 대상이었던 클린스만이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 되어 벤치에 앉아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기도 합니다.

 

 

클린스만은 그 시대의 메시나 호날두 같은 선수는 아니었겠지만 레반도프스키 급의 명성을 가진 선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클린스만을 보면서 저는 나름대로의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전천후 공격수"  라는 별명입니다. 골냄새를 잘 맡는

감각적인 선수였고, 스피드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돌파나 침투가 좋았으며, 팔을 제외한 온몸으로 골을 넣 선수였습니다. 저는 한국의 황선홍 선수와 좀 비슷한 스타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클래스는 다릅니다. 

 

아직도 클린스만의 94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셀프 발리슛 골은 한국의 축구팬들에게 두려움과 선망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제 막 프로선수가 된 클린스만의 어린 사진.

 

지금은 순하고 착한 이미지와 표정을 가지고 있지만, 선수시절 클린스만은 온몸을 던져서 골을 넣는 탱크 같은 선수였으며 카리스마있고 열정이 넘쳤으며 몸싸움에도 능했습니다. 전형적인 독일 군인같은 느낌의 선수였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98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5 대 0 으로 졌을 때 네덜란드의 오베르마스와 베르캄프를 보면서 잘하는 수준을 넘어 넘사벽의 실력과 피지컬에 공포스러워 했던 것 처럼, 클린스만 과거 한국 축구팬들에게 그런 선수였습니다. 

 

과거 클린스만의 선수시절 모습을 기억하던 저로서는 지금의 착하고 순한 성격의 모습이 잘 적응되지 않습니다.

 

역동적인 스타일의 축구스타 클린스만 선수, 이제 감독이 되었는데 저는 클린스만 감독님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클린스만 감독이 잘되려면 이번 2023 아시안컵을 우승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부디 행운이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리더쉽형 감독, 힐러형 감독, 동기부여형 감독 클린스만을 오랫동안 보고 싶습니다. 

 

클린스만 감독님이 경질되지 않도록 2023아시안컵 우승했으면 좋겠습니다.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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